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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이종민 옮김어크로스484쪽2만3000원
J D 밴스 미국 부통령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 미국 보수파 논객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 쓴 ‘미국은 왜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선택했는가’ 등 빈곤층 백인들이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분석한 책은 이미 많다. 하지만 저서 ‘감정노동’(1983)으로 감정사회학 분야 선구자로 자리 잡은 앨리 러셀 혹실드(85) UC버클리 명예교수가 지난해 미국서 출간한 이 책(원제 Stolen Pride)은 ‘이념’이 아닌 ‘감정’이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을 움직인다는 점을 파고든 연구서라는 점에서 여타의 책들과 대별된다.
저자는 미국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높고 둘째로 가난한 선거구인 주택청약종합저축 한도 켄터키주 파이크카운티 주민들을 대상으로 7년간 수백 시간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자부심(pride)’과 ‘수치심(shame)’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축으로 삼아 루스벨트, 케네디, 빌 클린턴에게 표를 던졌던 이 지역 주민의 80% 이상이 2016년과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이유를 분석한다.
석탄 채굴이 주력 산업인 이 휴대폰소지 지역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들이 벤츠를 몰고 다니던 부자 동네이자 “우리가 미국 전역에 불을 밝혔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대체 에너지 개발 등으로 석탄 산업이 쇠락하고 낙담한 주민들이 마약성 진통제를 남용하게 되면서 실패했다는 수치심에 점령당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자부심’은 자아의 피부이자 ‘쓸모 있음’을 주택담보대출 이자율 느끼는 감정이고, ‘수치심’은 벗어던지고 싶은 허물이자 타인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이 잘못했다 느끼는 감정이다.
저자는 미국에선 지지 정당과 상관없이 부유한 사람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도 개인의 경제적 운명은 개인의 책임이라 믿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2020년 조사 결과, 가장 가난한 계층에서도 87%가 ‘근면함’을 경제적 성공의 요인으로 대출상담센터 꼽았다는 것이다.
험준한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고립된 파이크 카운티 사람들은 특히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한 것이 주력 산업의 쇠락이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닌 자신의 근면함 부족이라 여기며 자책했다. “강한 자부심의 문화와 개인주의 윤리가 엄격히 지켜지는 사회에서 ‘성공하면 내 공, 실패해도 내 잘못’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으면 그 고통스러 청년창업자금대출 운 결과는 수치심일 수밖에 없다. 지역사회의 몰락은 개인의 수치심으로 전이되고 이는 다른 형태의 수치심까지 끌어들이는 자석이 된다.”
저자는 촉망받는 산업 역군에서 국가의 복지 혜택에 기대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수치심에 빠진 이 지역 사람들의 눈에 도널드 트럼프가 ‘수치심에 맞선 대표 전사’로 보였다고 해석한다. 수치심에 빠진 사람은 외부의 적을 비난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트럼프는 수치심의 서사를 ‘피해자의 서사’로 다시 썼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당신 책임이 아니라 민주당의 역차별로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이 혜택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바닥난 인종적 자부심을 다시 채움으로써 수치심을 지울 수 있도록 했다. 트럼프의 전략이 먹히면서 이 지역 사람들은 자부심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것’이라 느끼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주장이 미국 우파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나라를 둘로 갈라 놓았다. 저자는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사건이 결국 ‘잃어버린 자부심’과 결부돼 있다고 해석한다. “트럼프 특유의 연금술을 통해 ‘도둑맞은’ 대상은 점점 더 늘어났다. ‘잃어버린 것’이 ‘도둑맞은 것’으로 바뀌면서 수치심도 차츰 비난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수치심이 비난으로 바뀔 때마다 슬픔은 분노로, 우울감은 격분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전류가 흐르듯 강렬하게 퍼져나갔다.”
1월 6일 사태로 기소된 1265명 중 30명은 켄터키 주민이었다. 이에 대해 저자가 만난 파이크카운티 주민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였다. 폭력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폭력이 발생했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한 짓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일부가 폭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거나. 갸우뚱하는 저자에게 익명을 요구한 한 인터뷰이는 “‘구타당한 유권자 증후군’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한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아내가 돌아갈 곳이 없어 남편을 비호하듯, 트럼프가 못마땅하지만 자신들의 부당한 수치심을 지울 사람은 그밖에 없기에 표를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로 학자의 내공이 돋보이는 책. 미국 이야기지만 좌우 갈등이 극에 달한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대입해 읽을 수 있다. 책 속 여러 장면이 기시감을 일으키며 현재 대한민국 정치 지형을 움직이는 ‘감정’은 무엇인가 숙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