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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기자]









▲  <볼레로: 불멸의 선율> 스틸


ⓒ 찬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때는 1928년, 당대 프랑스의 저명한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무용가 '이다 루빈슈타인'에게 자신의 새로운 공연을 위한 발레 음악 의뢰를 받는다. 야마토
하지만 원래 계획은 자꾸만 어그러지고, 완벽주의 성향으로 유명한 라벨은 난관에 봉착하며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간다. 기존 곡의 편곡으로 충분할 줄 알았건만, 뜻하지 않은 저작권 문제가 터지거나 영감이 고갈되는 등 라벨의 스트레스는 깊어진다.
그런 가운데 성공한 예술가로 남 부럽지 않은 명예를 누리지만, 항상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라벨주식단기매매
의 뇌리에 그가 걸어온 길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젊은 시절 기존 유행을 벗어난 파격적 실험을 터부시한 당대 프랑스 음악계의 냉대와 외면, 자신뿐 아니라 세대 전체에 파괴적 영향을 안긴 1차 세계대전의 상흔, 설상가상으로 늘 의지하던 어머니의 죽음, 평생 마음에 두고 있던 자신만의 '뮤즈'와의 이뤄질 수 없었던 관계가 차례로 거장의 마음을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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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그런 인간적 시련과 고민 속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춰 나가게 마련이다. 여러 번 방향을 수정하고 의뢰자와의 첨예한 갈등에 직면하지만, 숙성된 영감은 마침내 라벨의 머릿속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을 그의 대표 걸작 '볼레로' 창조의 비밀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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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걸작의 탄생 배경










▲  <볼레로: 불멸의 선율>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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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




제목처럼 이 영화는 라벨의 대표곡 '볼레로'의 탄생 비화를 세밀하게 풀이하는 이야기다. 음악가도 제목도 모르지만, 이 곡의 반복되는 멜로디는 들어봤을 이들에게 원곡에 관해서 소개하는 취지가 본 작품의 출발점인 셈이다.

생전의 라벨은 자신의 수많은 작곡 중 유독 볼레로만 사람들에게 언급되며 자신을 대표하게 된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물론 후기 라벨의 작업 중 가장 야심 찬 도전이자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현대적 개성을 짙게 시도한 볼레로를 싫어했을 리 없지만, 라디오헤드가 아주 오랫동안 밴드 하면 조건반사로 떠오르는 대표곡 'Creep'을 공연에서 선곡하지 않던 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은 중압감이었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런 창작 과정의 고통에 덧붙여,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라벨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역사가들이 공인한 주요 국면을 시간 연대기와는 다른 구조로 접목해 이름과 대표곡 정도만 상식으로 알던 이들에게 명곡의 탄생이 창조주라 할 예술가의 인생과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는지 상세하게 풀이해 준다.
볼레로를 구상하던 1928년에 오십줄에 들어선 라벨은 당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손꼽히고 있었지만, 평생 그를 따라다닌 과도한 완벽주의와 그로 인한 부담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월광'의 드뷔시와 쌍벽을 이루며 일생의 경쟁 구도를 형성하다 1918년 드뷔시 사후엔 유일한 존재였음에도, 한창 두각을 나타내던 20대 시절 프랑스 기성 음악계의 상징과 같던 파리 음악원에서 냉대당하던 상처가 주요하게 라벨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소개된다.
1903년으로 날아간 20대의 청년 라벨은 이미 열광적인 팬과 대중적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민속 음악이나 현대적 사조를 과감히 접목한 개성 탓에 배척을 당하던 처지다. 30살이 되면 도전 자격이 박탈되는 권위 있는 음악상 '로마 대상'에 연거푸 5년 연속으로 낙방한 사례는 당대에 이미 논란을 불러온 바 있다.
예술을 넘어 동시대인이라면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의 상처도 빼놓을 수 없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이미 저명한 예술가 반열에 속한 데다, 사십이 넘은 라벨이 징병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는 굳이 자원입대를 고집한다. 의무부대원으로 입대한 그는 끔찍한 전장의 풍경에 예민한 영혼에 상처를 받고, 거기에다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던 어머니의 임종을 맞는다. 그렇게 정신적 피로로 인해 한동안 창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삶이 떨어질 수 없다는 예시의 차용이다. 라벨의 생애에서 공식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수시로 회상되면서 볼레로 창작 과정의 수난과 겹쳐 보인다.

거장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










▲  <볼레로: 불멸의 선율> 스틸


ⓒ 찬란




여기에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간 예술가의 비공식적인 인간관계가 다채롭게 조명된다. 그 당시 사회 유력 인사 가운데에는 의외라 할 만큼 금욕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지만, 자유로운 예술가의 영혼이 수도승을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각도로 욕망을 발현했다는 전제 아래 영화는 가십에 그치지 않게 라벨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어릴 적 다정한 교사이자 라벨의 음악성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스페인-바스크 정서를 드리운 추억부터 전쟁 통에 설상가상으로 그의 곁을 떠남으로써 상실감과 비애를 안긴 어머니와의 기억이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건 쉽게 상정할 수 있겠다. 라벨은 여성들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격의 없이 대하는 사람이었고, 가정부건 윤락여성이건 경청하는 태도를 지녔다. 그런 라벨이기에 주변에는 늘 여성이 많았고 긍정적 영향력을 교환하는 관계가 이어졌다.
처음 보면 부부로 여겨질 정도로 중년 이후 여러 질환으로 시달리던 라벨의 곁에서 충실한 파트너가 되어준 숙련된 피아니스트 '마르그리트', 볼레로 탄생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무용가 '이다 루빈슈타인'들이 라벨의 음악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제작진이 특별히 주목한 건 친구의 여동생이자 예술의 뮤즈인 동시에 이뤄지지 않은 애정의 대상인 '미시아'와의 인연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녀는 위대한 음악가의 내면에 잠재된 은밀한 갈망을 증폭하는 역할은 물론, 당대 문화예술의 후원자로서 뛰어난 감식안을 갖고 조언자로 활약한다. 여러 전기나 연구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바 있지만, '활동사진'화한 재연은 또 다른 맛을 제공한다. 흔히 빠지기 쉬운 에로틱한 연인 관계 묘사가 아닌, 차이콥스키와 그의 후원자로 잘 알려진 메크 부인과의 관계처럼 상호 유기적인 역할 모델로 재연된다. 그런 세부 묘사를 짚어가며 매 시기 라벨의 음악세계와의 연결 고리를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명곡의 탄생 과정










▲  <볼레로: 불멸의 선율> 스틸


ⓒ 찬란




범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겠지만, 라벨은 평생을 완벽주의와 열등감에 휩싸인 채 자기와의 싸움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가 만든 명곡들은 연주하기가 만만찮고, 음악가 역시 연주자들에게 요구 수준이 보통은 아득히 넘은 것이었다. 가장 적절한 볼레로의 연주 시간과 속도는 과연 무엇인지 (21세기에도 거듭되는) 논쟁은 영화 속에서 의뢰자인 무용가 이다와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최적의 분량을 고수하며 밀고 당기는 다툼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라벨은 처음 20분짜리 곡을 제안했으나 퍼포먼스 차원에서 너무 길다며 무용가가 15분으로 수정한 분량을 서로 대치한 끝에 기어코 17분으로 합의하는 과정은 훗날 수많은 최고의 연주자와 지휘자들이 각양각색으로 해석한 다양한 버전의 볼레로'들'로 영화의 맛을 확장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당대 최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라벨의 의도와 정반대로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1.5 배속 수준으로 13분 버전을 훗날 선보였고, 라벨은 오랫동안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고집 넘치는 예술가들의 초지일관 신념은 그렇게 지독한 갈등과 함께 창조적 대결을 이어갈 운명이었나 보다.
무용가로서 상류층의 구미를 중시한 무용가 vs 노동자나 소시민들과 동시대적으로 호흡하고자 한 음악가의 방향은 같은 쪽을 지향할 수 없었다. 서로 예술가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인데도 이다 루빈슈타인과 라벨의 갈등은 비공개 예행연습에서 요란한 파열음을 터뜨리기에 이른다. 좌절과 열패감에 휩싸인 라벨이 보기 드문 분노를 폭발하면서 곡 해석 관련 극한에 다다른 논쟁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볼레로의 팬이라면 쓴웃음 피식하며 감상할 만한 대목이다.
평단의 외면과 혹평에 늘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라벨은 자신이 견지한 개성적 스타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 늘 드뷔시와 자신을 비교하며 비하하는 음악 평론가의 거만함에 질색을 하면서도 속앓이하는 예술가의 초상, 마침내 위대한 걸작을 완성해 보기 좋게 한 코 먹이는 세련된 복수, 그 와신상담의 필살기가 자신의 젊던 시절 끊이지 않는 좌절을 안겼던 (어머니의 혈통이기도 한) 스페인 민속춤의 선율과 터부시되던 공장의 기계 소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현대성'까지 촘촘한 배경 풀이가 어우러진다. 그야말로 지금도 15분마다 어딘가에서 연주된다는 위대한 클래식 음악의 (신화로 포장되지 않은) 치열한 탄생 과정을 온전히 구축한 것이다.

볼레로의 팬이라면...










▲  <볼레로: 불멸의 선율> 스틸


ⓒ 찬란




마침내 라벨은 훗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질 대표곡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초연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며 영감이 식고 건강에 적신호가 왔던 거장의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하지만 라벨은 어느새 누구나 흥얼거리게 된 이 곡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어떻게 자신이 창작했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에 봉착한다. 음악가의 전기를 개괄적으로 접했다면 안쓰럽게 지켜볼 대목이다.

너무 성실하고 꼼꼼하게 풀이하는 형식이라 따르는 한계도 느껴진다. 배경지식을 잔뜩 전하려다 보니 초래된 관련 정보의 넘치는 나열, 혹은 영화가 극복하고자 한 전기영화의 틀에 갇히고 마는 구석도 종종 엿보인다. 라벨이 주인공일까, 아니면 볼레로가 주인공인 걸까? 관객의 초점에 따라 확연히 차이 나게 평가될 측면도 분명히 있다. 2시간 꽉 채우는 분량인데도 인상주의와 신고전주의 현대 클래식의 거장 & 아마 21세기 대중에겐 가장 친숙할 클래식 명곡의 서사를 다 담기엔 부족했나 보다.
그러나 도입부에서 볼레로가 고색창연한 클래식이 아니라 라벨이 원한 대로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으로 세계 음악 역사에 현재도 미래도 행사할 거대한 영향력을 살짝 선보이고, 이와 수미쌍관처럼 마치 라벨의 영혼이 강림한 듯 펼치는 장엄한 볼레로의 선율, 그리고 프랑스 현대 발레의 권위자 프랑수아 알루의 퍼포먼스 어우러지는 장면은 형언하기 힘든 감흥을 끌어낸다. 아마 극장 문 나서면서 몇 사람은 볼레로 선율을 흥얼거리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다.
<작품정보>

볼레로: 불멸의 선율
Boléro
2024｜프랑스｜드라마
2025.04.30. 개봉｜120분｜11세 관람가
감독 안느 퐁텐
출연 라파엘 페르소나즈, 도리아 틸리에, 잔느 발리바, 뱅상 페레즈, 엠마뉴엘 드보스
수입/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










▲  <볼레로: 불멸의 선율> 포스터


ⓒ 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