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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다시 찾다는 의미의 광복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정 과정에서 공식 명칭이 결정됐습니다. 단순히 피동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해방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했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광복절을 생각하다보면 마침 와인에서도 이름을 빼앗겼다가 되찾은 품종이 떠오릅니다. 이 품종은 사람들의 착각 속에 140여년 간 자기 고유의 이름 대신, 다른 품종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탈리아의 프리미티보(Primitivo) 품종을 미국에서 진판델(Zinfande 2009년주5일제 l)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지역별로 다른 이름으로 존재한 게 아니라, 아예 잘못 알려진 채 불려온 겁니다.
이젠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와인 생산국인 칠레에서도, 칠레 와인의 얼굴이라 불리는 까르미네르(Carmenere)입니다. 오늘은 해마다 11월이면, 마치 우리의 8월 광복절처럼 기념일까지 만들어서 지내는 칠레 까르미네르의 파란만장한 코픽스금리공시 이야기를 해봅니다.



수확기 까르미네르 포도밭의 모습. 까르미네르는 수확기가 되면 포도잎이 붉은 크림색으로 낙엽이 생긴다. 까르미네르라는 이름도 이 색을 뜻하는 프랑스어 카르민(Carmin)에서 따왔다고 한다. [출처=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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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이상하게 늦게 익더라
그 긴 이야기는 19세기 중반 보르도에서 칠레로 건너온 삽목(절단한 포도나무의 가지를 삽수로 만들고, 흙에 꽂아 뿌리를 내리게 해서 새 포도나무로 키우는 번식법)에서 시작됩니다. 새 땅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들은 포도나무 상당수를 칠레로 가져왔는 개인파산면책기간 데, 거기에 까르미네르가 섞여 있었습니다.

당시 보르도는 세계 와인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르도에서 주로 키우던 포도는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였죠. 이민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가져온 포도 역시 두 품종일 것이라고 믿고 정성스레 낯선 칠레 땅에 심어 키우기 시작합니다.
포도나무들은 대체로 잘 자랐습 르노삼성sm7 니다. 건조한 칠레의 여름은 유럽보다 병해에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곧 이상한 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나무들은 이상하리만치 포도 열매가 유난히 늦게 익고, 조금이라도 덜 익으면 피망·생허브 같은 향이 도드라졌던 겁니다.
하지만 이민자들은 이를 그냥 예민한 포도나무의 흔한 부적응 정도로 치부해버립니다. 결국 현장에선 편의상 이 낯선 캐릭터의 포도나무를 ‘메를로 칠레노’(칠레의 메를로)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렸습니다. 이때부터 이 포도나무의 이름은 메를로가 됩니다.
전환점은 1994년 늦가을, 마이포 밸리(Maipo Valley)의 비냐 카르멘(Viña Carmen) 와이너리에서 생깁니다. 프랑스의 암펠로그라퍼(ampelography·포도 품종을 감별하고 분류하는 전문가) 장-미셸 부르시코(Jean-Michel Boursiquot)가 예의 메를로 칠레노의 잎맥과 송이, 꽃의 생식기관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를로가 아니다’고 확신했고, 실제로 검사 결과 이 포도는 까르미네르로 밝혀집니다. 아무리 1800년대 중반 이민자들의 손에 들려 바다를 건넜다고 한들, 어떻게 아무도 이 포도를 몰랐던 것일까요?



프랑스의 암펠로그라퍼, 장-미셸 부르시코가 까르미네르를 발견한 비냐 카르멘에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출처=비냐 카르멘]




어떻게 140년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까르미네르의 원산지인 보르도에서 이후 까르미네르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민자들이 칠레로 떠나고 나서, 포도나무의 흑사병, 필록세라가 유럽 전역을 덥칩니다. 전체 포도나무의 80%가 고사할 정도로 위력적인 필록세라 앞에서 까르미네르도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죠.

끝내 와이너리들이 필록세라를 방어해낼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필록세라에 내성이 있는 신대륙(주로 미국)의 포도나무에 기존 유럽의 품종 포도나무를 접목시키는 방식입니다. 유럽은 이 방법 덕분에 다시 포도를 식재하긴 했습니다만, 까르미네르 식재엔 소극적이었습니다.
예민한 성격 탓에 접목 적응이 좋지 않았고, 안그래도 기르기에 까다로운 품종이었던 탓에 양조자들의 선호도가 떨어진 겁니다. 이렇게 까르미네르는 원산지에서 완전히 잊혀지게 됩니다.
한편 까르미네르의 정체를 폭로한 것만으로 세상이 곧장 바뀌진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140여년 간 까르미네르가 너무 오랫동안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기 때문입니다.
일부 전통을 중요시하는 와이너리들은 품종 등록이 법적으로 완전히 정리되기 전까지 까르미네르의 19세기 보르도식 별칭인 그랑 비뒤르(Grand Vidure)를 라벨에 적으며 무언의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1998년이 돼서야, 칠레 정부가 까르미네르를 공식 품종으로 인정하면서 오랜 혼선은 제도적으로도 매듭이 지어졌습니다.
이름을 되찾고 나니, 이 포도나무의 이상하다고 느껴졌던 특성이 다른 품종의 다른 캐릭터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메를로 칠레노, 아니 까르미네르의 양조와 재배 방법이 달라지기 시작한 겁니다.

편 참고."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8/16/mk/20250816153605749aehi.jpg" data-org-width="600" dmcf-mid="y8dvLuvaS9"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16/mk/20250816153605749aehi.jpg" width="658">

포도밭의 흑사병, 필록세라. 필록세라는 작은 곤충으로 포도나무 뿌리의 수관에 기생, 포도나무를 괴사시킨 후 죽은 나무를 버리고 토양을 통해 다른 포도나무로 이동한다. 자세한 내용은 와인프릭 <“흑사병만큼 무섭다”...1mm 크기 생명체에서 시작된 재앙>편 참고.




되찾은 이름, 그리고 함께 되찾은 캐릭터
앞서 언급했지만 까르미네르는 메를로보다 성숙이 늦고, 과도한 그늘과 수세(樹勢)에서는 풀잎 냄새를 뜻하는 피라진이 과하게 늘어납니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나무를 재배할 때 잎을 적절히 솎아내 채광과 통풍을 확보하고, 관개를 줄여 수세를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수확 시기 역시 기존 메를로보다는 늦추되, 과숙하지 않도록 미세 조정했죠.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는 과거와는 딴판이 됐습니다. 까르미네르 특유의 검붉은 과실과 다크초콜릿, 말린 허브와 향신료가 균형을 이루고 거칠던 타닌은 매끈해진 겁니다. 그 와중에 과숙을 방지해 산도 역시 유지했습니다.
까르미네르의 독특한 캐릭터와 원산지였던 보르도에서 절멸하다시피한 이야기 등은 매력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잡습니다. 곧 칠레의 여러 와이너리들이 까르미네르를 연구하고 독특하고 다양한 해석의 와인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간단하게 대표적인 것들을 꼽자면, 카차포알 밸리의 페우모(Peumo) 지역은 낮엔 충분히 덥고 밤엔 바람이 식혀 주는 떼루아 덕분에 까르미네르를 가장 안정적으로 생장하는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까르미네르 단일 품종으로 만들어내는 고품질의 와인이 생산됩니다.
콜차구아 밸리에서는 까르미네르를 중심으로 하는 레드 블렌드 와인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까르미네르는 다른 레드 블렌드의 보조 역할만 해왔는데, 중심이 된 겁니다. 특히 우리 시장에서도 친숙한 몬테스 알파의 퍼플 엔젤이 보여준 볼륨과 유연함은, 까르미네르가 단일 품종을 넘어 블렌드의 리더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평가받습니다.
한편 흥미롭게도 까르미네르의 뒤늦은 이름찾기는 칠레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벌어졌습니다. 중국 산둥성 옌타이·펑라이 일대, 닝샤 일대에서 오랫동안 재배된 까베르네 게르니슈트(Cabernet Gernischt)의 정체가 2012년에야 유전 분석을 통해 또 한번 ‘사실상 까르미네르’로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까르미네르 포도를 수확하고 있는 칠레 와이너리의 노동자. 까르미네르는 다른 포도보다 수확 시기를 늦게 잡기 때문에 붉게 물든 나뭇잎이 더 도드라진다.




되찾은 빛의 날, 되찾은 이름에 건배!
까르미네르는 ‘메를로 칠레노’라는 오래된 착각을 걷어내고 제 이름을 되찾은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다뤄지고 맛보아졌습니다. 자신이 아닌 존재로 불리고, 맞지 않는 방식으로 재배되면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포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포도가, 제 이름을 찾은 뒤에야 자기만의 캐릭터와 숨은 아름다움을 뽑낼 수 있게 된 겁니다.

우리 선조들이 해방이나 독립 대신 광복을 선택한 것 역시 단지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나라를 제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숭고한 선택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광복절 저녁에 잊혀진 이름을 되찾은 까르미네르 와인을 한잔 곁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